I. 전시개요
- 전 시 명 : <>
- 작 가 : 홍수연
- 기 간 : 2009년 5월 8일(금)~6월 3일(수)
- 장 소 : the room (토탈미술관 내 프로젝트 스페이스)
- 아티스트 토크 : 5월 25일 월요일 15:00
- 개관 요일 및 시간 : 화요일-일요일, 11:00-18:00 매주 월요일 휴관
II. 전시 내용
분절과 분절 사이를 미끄러지는 ‘층들’
단순한 예로 시작해보자. 시간과 시간 사이에 분이 놓이고, 분과 분 사이에 초가 놓인다. 이러한 규격화된 틀을 통해 하루를 살고, 일년을 살고, 평생을 산다. 생의 시작을 알리는 것도, 생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도 역시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산하기 좋은 단위를 설정하고 그것을 통해 분절된 세상과 마주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방식이다. 물론 생은 연속체이지 분절체가 아니다. 그렇다면 분절과 분절 사이, 즉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아니면 지워버렸거나, 망각해버린) 그 지점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단순한 예에서 시작했지만, 질문은 복잡해졌다.
삶은 연속체이다
홍수연 작품에 안착되어 있는 대상들은 어떤 뚜렷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기에 프레임 가득 메운 단색면이 우선적으로 포착된다. 단색면이 뿜어내는 적막(寂寞)에 잠식될 쯤, 그 고요를 흔드는 미세한 떨림이 포착된다. 어떠한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기에 그것을 무엇이라 이름 부를 수 없는 그 무언가가는 응결된 이미지로 보이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자신의 잔상을 보인다. 이미지의 윤곽은 고착되지 않고 분절과 분절 사이의 미지의 순간으로 미끄러진다. 귀결점 없이 지속적으로 미끄러진다는 것을 바꿔 말하면 즉흥성과 우연성을 근간으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수연의 작업방식은 오히려 그 반대로 향하고 있다. 오히려 철저한 계산과 의도로 진행된다. 계산된 캔버스의 기울기, 아래 층을 윗 층에 부유하게하고 그 층이 또 다른 층에 부유하도록 조절된 물감의 양이 만들어내는 투명성. 그리고 이를 통해 획득되는 시간성. 이러한 요소들을 통해 하나의 층이 하나의 형태이면서 다음 형태의 잔상으로 존재하게 된다. 일견 이러한 구조가 또 다른 형태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층들이 켜켜이 쌓이면서 화면 전체가 천천히 진화하고 있는 유동적 이미지로 인식된다. 최소 단위로 분절 시켜 그것을 규정하려 하여도, 그것은 또 다시 다른 지점을 향해 진화한다. 중첩과 겹침, 드러냄과 숨김, 즉 ‘층’이 아닌 ‘층들’을 통해 의미가 획득된다.
아마도 지금까지 우리는 층에 대해서 사고하는 방법을 학습했고, 층과 층을 구별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고, 더 나아가 그것이 진리라고 믿으며 의심하지 않았다. 연속체를 사고하기 보다는 그곳에서 분절점을 찾아 그것을 논리에 맞게 재구성했다. 그러면서 분절점과 분절점 사이를 희생시켰다. 그러나 홍수연은 그 지점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복원한다. 그의 색면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리고 변화하는 대상들도 너무 천천히 변하고 있기에 전체적으로는 적막하다. 그러나 돌이켜 보건데 우리의 삶이라는 것 역시 거대한 또는 중요한 분절점으로만 규정 할 수 없다. 거기에는 그간 우리가 잠시 잊었던 사소하고 느릿한 변화들로 가득하다. 홍수연은 그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자! 그렇다면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자. 익숙해져 있던 것들이 낯설게 보이지 않는가. 층으로만 인식했던 것에서 그곳이 실상은 투명막의 생으로 존재한다. 적막으로 가득했던 공간을 깰 수 있는 그들의 활발한 웃음과 층과 층들이 만들어 놓은 충돌의 소리에 관심을 가져보자. 이제 여기에 귀를 기울이자. (글. 이대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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